광양시는 백제시대에는 마로(馬老), 통일신라시대에는 희양(曦陽), 고려시대부터는 광양(光陽)으로 불려 왔는데, ‘마로’는 우두머리, ‘희양’, ‘광양’은 따스하게 빛나는 햇살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삼국시대에 마한에 속했으며, 백제의 마로현이었고, 통일신라 경덕왕 때 희양현으로 고치고 승평군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에 광양현으로 개칭하고 승평군에 속하였다. 후에 감무를 두었고, 1413년(태종 13)에 현감을 두어 순천도호부의 관할 아래 두었다. 1895년(고종 32) 광양군으로 승격하였다. 1910년 진하면과 월포면을 합하여 진월면으로 개칭하였고, 1914년 돌산군 태인면이 편입되었다. 1924년 우장면, 칠성면, 사곡면 등 3개 면이 광양면으로 흡수되었고, 1925년 인덕면이 광양면에 편입, 89면이 되었다. 1949년 광양면이 광양읍으로 승격하였다. 1986년 골약면, 태금면, 옥곡면 광영리를 관할하는 전라남도 광양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7년 옥곡면 광영리가 골약면 광영리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고, 여천군 묘도동 지진도가 태금면으로 편입되었다. 1974년 골약면의 태인리, 금호리를 분리하여 태인출장소로 개편하였고, 1981년 광양제철소 입지를 광양만으로 확정하고 1982년 12월 7일에서 1983년 11월 26일까지 이주단지 사업 추진으로 금호도 원주민(4개 부락)이 옥곡면 광영리로 집단 이주하였다. 1985년 2월 2일 광양항 컨테이너부두 입지가 최종 확정되었다. 지난 1989년 당시 광양군의 일부 지역이 동광양시로 분리되었으나, 1995년에 통합을 이루어 도시와 농촌 복합형 도시인 광양시로 새출발 하였으며, 21세기 해양시대를 맞아 동북아시아의 물류거점 항만도시의 커다란 도약이 기대되는 고장이다.
나. 우리 고장의 상징물
시의 나무(木)고로쇠
이른 봄 수맥이동으로 부지런함과 건강을 상징
백운산의 해발 600m~800m 지대에 자생하는 나무로 이른 봄 경칩을 전후해서 채취
하는 수액은 고로쇠 약수로서 약효가 뛰어나 주민소득증대에 기여하고 있다.
시의 새(鳥)갈매기
협동심과 개척정신이 강해 끈기와 진취성을 상징
향토적이고 고결하며 친근감을 주는 새로 협동심과 개척정신이 강해 광양 시민의 끈기와
진취성을 상징한다.
시의 꽃(花)동백꽃
어려운 역경에도 곱게 피어나느 향토애와 불굴의 의지를 상징
백계산 옥룡사지에 천년 신비를 간직한 동백림
(국가지정사적 제407호, 7ha)은 도선국가가 절터의 기운을 보호하기 위해 심었다는 전설이
있다.
3. 우리 학교가 위치한 ‘봉강면’의 역사적 인물
가. 매천 황현
한말 마지막 선비로 추앙받은 우국지사 매천 황현 선생님은 1855년 12월 봉강면 서석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학문의 깊이가 더해지면서 한말 한문학의 4대 문장가(강위, 김태영, 이건창, 황현)로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 매천은 당시의 부패한 과거 제도와 조정의 현실을 간파하고 고향인 광양과 구례로 낙향하여 그의 대표저서인 역사비평서 「매천야록」을 비롯하여 시문집인 「매천집」, 「동비기략」 등을 저술하였다. 1910년 9월 10일 을사늑약의 치욕을 당하자 절명시를 남기고 56세의 일기로 자결하였다. 1999년 문화관광부의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그의 정신은 현재까지 후손들에게 전해져 오고 있다.
<매천 환형 선생 영정>
<매천 환형 생가> 봉강면 석사리 소재, 2001년 복원함
나. 형제의병장 강희보‧강희열
<형제의병장을 기리는 사당 봉강면 신룡리 소재>
강희보(형)와 강희열(동생)은 1560년 경에 봉강면 신촌마을에서 강천상(진주 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강희보는 광양에서 100여 명의 의병을 모아서 단성(지금의 경남 산청)에서 적과 싸우고 있던 백부 강인상을 구원하고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석주관을 수비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위세를 떨치던 왜군이 행주산성 싸움에서 권율 장군에게 크게 패한 후 위세가 꺽이어 1593년 4월부터는 경성(서울)을 철수하여 남하하기 시작하였고 6월에는 경상남도 진주 쪽에 머무르게 되었다. 진주성의 위급한 상황을 전해들은 강희보, 강희열은 휘하 장수들과 더불어 왜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 당시 진주성 사움은 아군 병력이 1만여 명인 데 비해 왜군은 10만이 넘는 대규모 병력으로 비교가 되지 않았으나 9일간의 혈투 속에서 손실을 크게 입은 왜군은 결국 진주성에서 철군하고 말았다. 뒷날 조정에서는 희보, 희열 형제를 진주 창열사에 배향하였고, 영조 40년에는 강희보에게는 형조좌랑(정6품), 강희열에는 병조참의(정3품)가 추증되었다.
[자료제공: 광양시청]